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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배달된 편지: 6·25 전쟁과 '피난 우표'의 눈물겨운 역사

대한제국의 '독수리 우표'와 만국우편연합(UPU) 가입으로 찬란하게 빛나려 했던 우리의 우편 주권은 일제의 강탈로 얼룩졌고,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한반도는 또다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바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발발한 민족 최대의 비극, 6·25 전쟁이었습니다. 모든 인프라가 파괴되고 전 국민이 피난길에 올랐던 참혹한 포화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우편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습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의 소식을 전할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우체부들의 눈물겨운 헌신, 그리고 임시수도 부산의 열악한 인쇄소에서 탄생한 '피난 우표'와 '군사우표'에 대한 뭉클한 역사 고증 기록** 을 전해드립니다. 1. 임시수도 부산의 열악한 유산: '피난 우표'의 탄생 전쟁 발발 직후 수도 서울을 빼앗긴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한반도의 최남단인 부산까지 밀려내려 가 파천(임시수도 지정)하게 됩니다. 당시 체신부(현 우정사업본부) 역시 부산으로 긴급히 이전했으나, 우표를 인쇄할 전문 장비와 특수 종이는 모두 서울 조폐창에 두고 온 상태였습니다. 당장 편지를 붙여야 하는데 우표 재고가 바닥나자, 체신부는 부산 자갈치시장 인근의 일반 민간 인쇄소(동아도서출판사 등)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국가 보안 시설이 아닌 민간 공장에서, 그것도 피난처의 조악한 인쇄기와 해방 직후 굴러다니던 거친 종이를 모아 급하게 찍어낸 우표들이 바로 수집학 명칭 **'피난 우표'** 입니다. 이 시기 발행된 우표들은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천공(테두리 바늘구멍)을 뚫을 기계가 없어 수집가들이 가위로 비뚤비뚤하게 잘라 써야 하는 무천공 형태로 유통되기도 했고, 잉크가 부족해 색상이 번지거나 흐릿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악함...